경계선상의 플레이어, 그와 마주한 사이 연결의 합주
허대찬 (미디어문화예술채널 앨리스온 편집장)

작가 이해강에 대해 알아보려 할 때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정보는 ‘그래피티(graffiti)’이다. 화려한 색, 자유로운 선, 칠해지고 덧대어지며 뿌려진 다양한 질감. 대단히 밀도 높은 형상이 함께하며 혼란하지만 자유롭고, 폭발적이지만 방향성이 조율된 것이 그의 작품에 대한 인상이다. 매우 많은 요소가 엮여있는 표면에 시선을 이끄는 덩어리 감이 사고의 방향성을 유도하는 가운데 그것을 통해 본격적인 인식과 연결의 게임이 시작된다.

‘그래피티’에 대해 떠올려볼 때 가장 먼저 수면에 닿는 것은 자유, 그리고 반항이다. 그래피티의 실행자는 거리(street)나 역사(station) 같은 공공장소에서 어떠한 허가나 허락 없이 시각적 기호를 남긴다. 이것은 자유로운 자기표현으로서의 인간 본연의 본능에서부터 억압이나 규칙과 같은 사회적 틀에 대한 저항, 그리고 그러한 메시지를 공유함이라는 정치적 함의까지 인간의 폭넓은 문화적 토대를 공유한다. 그렇기에 다양한 영역에서 차용되어 각자가 목표한 바를 강화하며 문화사회 전반에 자리하고 있다. 이해강은 그 토대에서 현대미술의 대지에서 캔버스, 애니메이션, 디지털 매체를 포괄하는 영역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다만 그의 대지는 미국 사회의 대표적인 하위문화에서 독자적인 미학을 지닌 예술형식이거나 1980년대 등장한 신표현주의와 연결하는 관점, 또는 새로운 형태의 일상과 예술이 결합하는 방식으로 해석한 모델 등의 기존의 그래피티를 바라보는 시선과는 다르게 읽힌다. 그의 궤적은 자유롭지만 경계의 명확한 인식을 기반으로 하며, 반항이지만 동조와 이해를 근간하여 펼쳐진다. 그의 작품을 바라보며 거리와 갤러리를 병치할 때 은연중에 드러나는 수직적 위상과 충돌, 캔버스라는 전통적 매체와 TV/Paint Animation Pro라는 디지털 툴(tool)로 대비되는 수평적 범주가 자아내는 대비의 좌표, 그 위에서 노니는 경계선상의 탐색자를 떠올린다.

개인적으로 그를 처음 접한 것, 동시에 가장 인상 깊었던 그와의 조우는 갤러리2(Gallery2)에서의 개인전 《MASHED POTATO》를 통해서였다. 당시 큐레이터였던 지인의 소개로 방문하게 된 전시에 펼쳐져 있던 풍경은 생경하나 친숙한 기묘함이었고 단서를 찾는 과정은 연결이 주는 쾌감이 있었으며 종국에는 이해를 관통하는 종합의 즐거움으로 매듭짓는 롤러코스터 같은 여정이었다. 가로로 11개의 이미지가 3줄로 배열된 33점의 그림으로 구성된 <BHWS02 ~ WDYR70>를 처음 보았을 때 각각의 이미지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조합과 구성이 무엇인지를 쉽게 파악하지 못했다. 각 프레임 안의 이미지가 초상화와 같은 구도와 형상이며 몇 개의 이미지가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닮았다는 것, 그리고 그 캐릭터가 어떤 동물인지를 인식하면서 이해가 시작되었다. 곰돌이 푸(Pooh)의 티거(Tigger) 같은 형상 옆에 루니 툰(Looney Tunes)의 벅스 버니(Bugs Bunny)처럼 보이는 모습이 떠오르며 불현듯 12간지와 띠, 그러니까 우리의 나이 개념이 연결되었다. 그런데 닮았거나 어떤 것 같다는 확신과 확인이 아닌 추측이 우선 닿은 것은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 변형과 재구성이 되었다는 것이며 무언가 겹쳐있거나 중첩되고 혼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인에게 다소의 힌트를 듣고 나서야 현재의 구도가 이해의 영역에 온건히 안착하였다. 우리나라의 빠른 연생에 대한 사회적 합의. 교육법상 3월 1일부터 이듬해 2월 28일에 태어난 사람들이 한 학년에 속하는 상황 덕분에 같은 해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1~2월 출생자의 나이가 사회 집단 안에서 다르게 이해되는 국면은 집단 안에서 소속과 규정에 대해 다양한 스펙트럼을 펼치게 했다. 누군가는 동질감을, 누군가는 혼란과 갈등의 상황을 마주한다. 이런 모호한 한국적 생년의 개념, 두 개의 출생 연도의 띠가 한 연령대로 이해됨에 펼쳐지는 분광된 상황에 대해 작가는 두 띠를 상징하는 동물을 모핑(morphing)이라는 이미지 변형의 사이 과정을 밟은 듯한 장면으로 재현해 냈다. 쥐와 소, 소와 호랑이, 호랑이와 토끼. 빠른 연생을 떠올리는 이 걸쳐진 정체성의 동물 간의 융합 이미지는 서로 연결되어 결국 그 시작과 끝이 결국 같은 나이로 인식되는 그럴듯하면서도 말이 안 되는 이미지의 집단을 형성했다.

여기에 살펴볼 중요한 지점이 있다. ‘사이’라는 부분이다. 위에서 설명한 생년, 즉 띠를 상징하는 동물의 사이. 그리고 그래피티에서 시작하여 회화로 안착한 매체의 사이, 공공장소이자 점유해야 하는 투쟁의 장소로서의 거리(street)와 사적 공간이며 또한 예술만을 위해 안배된 전시장의 사이. 그는 각자 구분되어 인식되고 우리의 내외부에서 작동하는 그 사이에서 차이를 감각하며 그의 시각과 해당 순간의 결과가 자리할 영역을 고려하여 자신의 심상을 안착시킨다. 그 재현의 과정에 있어 작가의 사이 경험과 행위가 흥미롭게 작동한다. 그는 긴 그래피티 활동을 진행했고 갤러리와 레지던시 기반의 창작 활동 중이며, 붓과 캔버스와 동시에 애니메이션 툴을 직접 다루고 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그는 자유롭게 경계선 위를 활보한다. 그래피티나 회화에서 물질성을 고려하여 탄생한 이미지가 애니메이션 영상의 소스로 다루어질 때 그 비물질성과 운동성이 가미되고, 반대로 물질로 다루기 힘든 심상에 대해 그래픽 이미지 기반의 영상을 제작한 후 그 사이를 메우는 이미지를 회화에서 재현하며 물질성이 확보되는 등의 과정과 결과이다.

이러한 사이를 다루는 그의 행위는 앞서 언급했듯 물질성을 대표하는 회화작업과 비물질적 영역에 걸쳐있는 디지털 매체 작업을 병행하면서 발현 중이다. 그 중요한 분기이자 중계지가 바로 ‘도깨비 공원’일 것이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도깨비 공원’은 그에게 작업을 포함한 인생 전반에 종합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중요한 장소이자 대상이다. 도깨비 공원은 그의 아버지, 고 이기후 교수가 8명의 대학원생이 함께 7년간 공을 들여 2005년 개장한 세계 유일의 도깨비 테마 공원이다. 동시에 그의 타계로 결국 2015년 폐쇄된 기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것은 작가에서 있어 의무감의 장소이자 탐색의 장소이며 연구의 대상이자 재현의 대상으로서 작동 중이다.

전시 《도깨비 공원》에서는 제주의 도깨비 공원에 아버지와 동료가 함께 수집한 수천 점의 도깨비 수집품을 분류하고 기록하며 정리해 나가는 과정 중에 그림으로 기록한 도깨비 조형물에 대한 전시였다. 그는 기록한 도깨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가는 조형물의 경과를 캔버스에 켜켜이 담아내었다. 이 과정은 붓을 통한 본인의 수행적 재현이라기보다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하여 흩뿌리듯 다가오는 시간의 경과를 받아들이며 그 장소에 남은 도깨비의 경과를 영상의 프레임처럼 겹겹이 쌓아낸 주관적 기록이고 기록적인 표현이다. 한국의 도깨비는 서구의 비인간 전설의 그것과는 다르게 양가적이다. 순박하지만 교활하고 마주하는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만 동시에 도우미가 되기도 한다. 매우 강력한 힘을 가졌지만, 치명적 약점도 함께 노출한다. 그에게 도깨비와 도깨비 공원은 개인적이지만 사회의 공공성의 맥락을 함께 가지며 또한 양자의 측면 모두에서 상상의 발현과 연결의 여지를 뻗을 수 있는 그런 존재일 것이다.

이 중계지점은 그의 온라인미디어 프로젝트 <도깨비공원.com>과 메타버스 프로젝트 <느영나영>으로 연결된다.   www.dokkebipark.com에 접속하면 마주할 수 있는 <도깨비공원.com>은 웹브라우저상에서 작동하는 탐험적인 요소를 지닌 게임이자 아카이브 작업이다. 넓은 도깨비 섬을 돌아다니며 여러 장소에 배치된 도깨비 조형물에 가까이 다가가면 타게팅(tagetting)이 되고 그것을 클릭하면 그가 재현한 도깨비 이미지와 그 도깨비의 속성이 출력된다. 화면의 인터페이스상의 도깨비 방망이를 누르면 도깨비가 섬을 내리치는 효과와 함께 아카이브 웹페이지가 열린다. 이곳에는 그가 지금까지 정리해 낸 도깨비 조형물의 현장 사진과 공원 조성 중 제작된 스케치 자료, 조형물 제작을 위한 미니조형 촬영본, 전경과 지도 등 가히 방대하다고 할 수 있는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 2005년 개장하여 2022년 현재까지 그곳을 담아낸 게임 형식의 맵 아카이브와 웹 형식의 자료 아카이브는 사람들에게 도깨비 공원을 기억하며 경험할 수 있는 방문지이자 작가 자신의 시간과 그 감정을 이어줄 수 있는 중계지로서 작동할 것이다.

창작그룹 레벨나인(rebel9)과 함께 진행한 메타버스 프로젝트 《닷과 대쉬의 모험》 중 하나의 챕터인 <느영나영> 또한 이 도깨비 공원과 연계된 디지털 미디어 프로젝트로서 작동했다. 제주 방언으로 ‘너하고 나하고’의 의미를 가진 ‘느영나영’이라는 제목에서부터 관계와 연결에 대한 지향을 느낄 수 있다. 그곳에 로그인하면 쥐고 있는 방망이로 돌을 두드려 도깨비를 깨우는 행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평면 도깨비 이미지의 조형성 및 운동성과 이와 연계된 백그라운드 사운드 및 연속 중첩되는 사건에 의한 믹싱과 화음은 그가 지향하는 경계에 대한 접근과 연결의 감각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동인이며 장치이다. 그 감각은 ‘두드린다-깨어난다’라는 단순한 규칙의 수행을 통해 충족되며 그곳에 로그인한 많은 접속자 간의 유동적인 관계 및 규칙 설정에 의해 더욱 풍부해진다.

<https://finalfla.sh> 역시 그의 기술 미디어에 대한 관점을 드러내는 또 다른 웨이포인트(way point)이다. 제목의 웹페이지 주소를 방문하면 마주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스스로 시각 작업자로서 음악의 제작과 유통을 다루어낸다면 어떠한 시스템이 탄생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에서는 음악 제작과 연주에 사용하는 응용프로그램인 시퀀서(sequencer)나 입력한 음과 리듬간의 반복 조합이 가능한 전자악기 런치패드(Launchpad)와 같은 컨트롤러의 구조와 인터페이스를 갖추고 있다. 해당 웹페이지에 접속한 이용자는 화면에 분할되어 배치된 사운드 소스와 영상 클립을 조절할 수 있는 스위치들을 조작하여 화면과 스피커의 출력물을 조절해 간다. 그렇게 만들어 나간 결과는 사운드와 연동된 영상의 결합물이며 각자의 시작점과 끝맺음의 조합, 그리고 과정의 맥락이 특유의 볼륨감과 연결 감각으로써 눈과 귀에 안착한다. 그 영상에는 2020년에 진행된 전시 《Final Flash》에서 비롯된 다양한 악당들, <드래곤볼>의 베지터와 프리더, <유유백서>의 도구로 동생과 <원펀맨>의 가로우 등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의 영상 파편은 시퀀서 스위치의 조작을 통해 기이한 영상의 합주 풍경을 이루어낸다. 이들이 각각 조합되고 해체되며 등장하고 사라지는 장면은 기존의 캔버스에 정착되었던 이미지가 사운드를 통해 시동하여 질주하는 운동성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운동을 내포한 잠시 멈춤의 상황과 장면을 다루어낸다. 그는 작품을 구성하는 이미지의 기본 골자가 되는 이미지를 설정하고 그 위에 변형 중의 이미지를 잡아내어 중첩한다. 그 이미지는 애니메이션에서 이야기하는 시작과 끝 점을 지칭하는 키 프레임(key frame)이라기보다 키 프레임 사이 두 이미지를 연결하는 순간의 그것이다. 그것은 사이에서 모핑되는 순간이거나, 또는 변화의 사이 공간을 자연스럽거나 독특하게 채워내는 스미어(smear) 컷이다. 어떠한 상황과 메시지를 정리하고 완결하여 정착한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운동 중이고 진행 중이며 단지 일시 정지의 상태이다. 약간의 에너지만으로도 재차 어딘가로 이동하며 다음의 상으로 변형될 수 있는. 그렇게 펼쳐진 작품의 평면은 정교하고 화려한 질주가 기대되는 루브 골드버그 장치(Rube Goldberg machine)이거나 복잡한 설정의 도미노 게임(domino game)의 시작 지점이다. 이미지에 과정을 덧씌워 에너지의 준위를 높여놓은 그의 평면은 안정과 정착 이전의, 이탈을 전제하며 정적이지만 분출을 명확히 예고하고 있는 현상적 상황이다.

그는 재현의 과정, 정착의 방법에 대해 그렇게 중간자로서 경계를 다루어내는 화자이다. 그래피티와 회화, 물질과 비물질이라는 서로 다른 영역에 대해 경계선  상에서 자신만의 관점으로 번역하고 해석하여 정착시키고 있다. 시작과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며 잡아낸 순간은 약간의 에너지로 재차 변화하고 언제든 이동할 불안정 상태와 같지만, 그 방향성은 한편으로 관람자의 선택에 의한 모험의 시작이자 분기로서 다가온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서 있는 대지가 어디인지, 자신의 행위가 무엇인지 그 근본과 좌표를 고민하는 방랑자이다. 스트리트 아트와 컨템포러리 아트, 캔버스와 애니메이션, 아버지와 아들. 그의 작품세계와 여정에 다양한 영역과 대상이 충돌하고 연결되며 끊임없이 의미와 맥락의 끈이 형성된다. 그렇게 드러나는 장면은 영역의 면이라기보다는 경계선상의 망이다. 영역 자체를 다져나가기보다는 영역을 인식하는 경계선 위에서 차분히 발자국을 떼며 바라는 위치에서 실을 묶어 드리우고 있는 듯 하다. 그 끈을 어떻게 받아들여 연결하고, 또 다른 의미의 망을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역할은 관람자에게 전달된다. 관람자는 그 흥미롭고 불안정하며 동시에 유동하며 그 다음을 유혹하는 평면 위에서 작가가 건네는 역할에 대한 행동을 충실히 수행하게끔 안내받는다. 경계선상의 플레이어는 또 다른 경계 위의 플레이어에게 바톤을 건내고 그 연계는 새로운 이해의 영역을 형성하며 세계의 유동을 지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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